유갑자세(維甲子歲) 인종 22(1144)년 4월 16일에 친우 시예부원외랑(試禮部員外郎) 허순(純)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제 아버님이 돌아가셨으니 명문(銘文)을 청탁하노라” 하였다. 내가 공의 집안에 관해 상세히 알기 때문에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공의 이름은 재(載)요 자는 수강(壽康)이며 공암현인(孔巖縣人)이다. 증조 현(玄)은 경종조(景宗朝, 976 ~ 981)에 진사가 되어 갑과(甲科)에 등제하였다. 얼마 후 랑(郞)의 벼슬이 되었으며 다시 공문박사(攻文博士)에 임명되었다. 공적이 있어 공신이 되었으며 소부소감(小府少監)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원(元)으로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내사인 지제고(內舍人知制誥)에 임명되었다. 부친은 정(正)이니 벼슬은 대창승(大倉丞)에 이르렀는데 불행히 일찍 별세하고 어머니는 강릉김씨(江陵金氏)인데 증 강릉 군부인(贈江陵郡夫人)으로 85세에 별세하였다. 공이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
으나 홀어머니를 잘 섬겼다. 늙으신 어머니를 모신데다 집안이 가난하여 선대의 유업을 제대로 계승할 수 없어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다행히 외고조인 삼한공신(三韓功臣) 김극렴(金克廉)에게 의탁하여 관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어른처럼 늠름하였고 항상 절의를 지키며 공의(公義)를 받드는 것으로써 뜻을 세웠다.
숙묘(肅廟) 재위시(在位時)에 철주방어판관(鐵州防禦判官)으로 임해 그 치적이 매우 뛰어났다. 개경에 돌아와서는 내환(內宦)으로 입사하여 예종조(睿宗朝)에 국가의 대·소사(大小事)를 잘 알아 국사에 관한 모든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예종께서 동비(東鄙, 九城戰役)에 임할 때 공은 병마녹사(兵馬錄事)로 종군하여 공(功)을 세웠고 9성(九城)을 개척 평정하였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길주(吉州)성을 수호하였다. 그 당시 9성(九城)중 길주(吉州)가 적과의 경계에 가장 가까워 적의 공세가 날로 심해짐에 원수(元帥: 군사를 통솔하는 장군)가 막료들과 더불어 분전하였으나 재삼 실패하니 적은 기세가 살아 침략해옴에 몇 번이나 패한 바 있었다.
공이 홀로 계책을 세워 하룻밤 사이에 겹성(重城: 겹으로 쌓은 성)을 쌓아 놓음에 적이 대경실색해 퇴각하였다. 공이 성(城)을 굳건히 지킨 지 130여일이 지나니 적이 드디어 화의를 청해 왔다. 참으로 삼군(三軍)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공의 공로였다. 전조(前朝)에 비록 원흥(元興), 자주(玆州)를 지켜왔다고는 하나 이보다 더 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임금이 예를 갖추어 접견하고, 위로하며 특별히 발탁 등용하였다. 인종 임금이 즉위하여 논공하는 조칙(詔勅)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길주를 지키기가 매우 어려웠다.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미치지 못 해 적의 공격이 심해 성이 무너지고 장수들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계책이 서지를 않았다. 이때 경(卿)이 몸소 지친 병사들을 독려하여 겹성(重城)을 쌓고 담장에 올라 몸을 기대면서 비 오듯 하는 화살을 무릅쓰고 적을 막아내었는데 2천여 병력으로 6만의 예봉을 꺾고 격퇴하여 원수(元帥)로 하여금 전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한 것은 오직 공의 힘인고로 아성고(我聖考, 예종-인종의 아버지)가 장차 쓰려고 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과인(寡人)에 이르러 공(公)의 공적(功績: 노력과 수고를 들여쌓은 결과)을 잊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누차 발탁되어 수사도중서시랑(守司徒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 등의 제직(諸職: 여러 직책)에 올랐다. 인종4(1126)년에 궁중에 변고가 있자 공은 지성으로 사직(社稷)을 보위하였으나 너무 고직(孤直)하고 술수가 없으니(無術) ‘불손하다’ 하여 집권자들이 마땅치 않게 여겼다. 비록 임금이 공의 충성심과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뭇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어 풍주방어사(豊州防禦使)로 벼슬과 직위를 낮추었는데 공은 마음 상해하지 않고 매사에 지난날 못지않게 업무를 잘 처리하였다.
풍성(豊城)은 서해 바닷가에 있어 송(宋: 당·오대십국에 이어 조광윤이 960년에 세운나라)나라 요(遼: 914년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세운나라)나라 등과의 통로에 가까워 처음에는 축성하여 침략군에 대비해 왔으나 태평세월이 이어지면서 성벽이 모두 풍우에 시달려 초목이 무성했다. 이에 민생이 불안하므로 공이 이를 안타갑게 여겨 조정에 보고하여 수축하였다. 1,340여 성(城)간에 신무기를 만들어 불시의 침략자에 대비케하였다. 또한 조정에 아뢰어 부근의 도·주·군(道·州·郡)에 실어 보내는 미곡을 인근 성내에 비축케하여 성(城) 안에 군수물자를 충족하게 하였다. 기타 송사(訟事: 분쟁)도 마치 강수나 하수를 터놓은 듯이 시원하게 처결하니 백성들이 부모님같이 사모하였다. 기한이 차자 병부 상서(兵部尙書)로 근무케 되었다.
공의 천성은 악(惡)을 원수처럼 여겨 권세에 연연치 않으므로 공을 꺼리는 자가 적지 않았다. 이즈음 틈을 타 왕명을 막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공이 말하되 사생화복(死生禍福: 죽음과 삶, 재앙과 복)은 하늘에 있으므로 개의할 바 아니라고 하였다. 다만 수년간 봉급이 끊어져 재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말년을 보내려 하였으나 다시 개부의동삼사 호부 상서(開府儀同三司戶部尙書)를 제수받고 이전처럼 봉직하였다.
인종(仁宗) 13(1135)년에 서경(西京: 평양) 반란이 있었는데 이들이 왕명을 거역하며 1년여가 되어도 투항하지 않았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하고 물으니 모든 신하들이 한결같이 군대를 보내 성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하였으나 공이 답하기를, “군사를 밖에 내 놓으면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는데 하물며 신이 일찍 유수(留守)로 종사한 바 있는 서경(西京)은 성(城)이 너무 견고하여 난공불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근에 축성을 하고 병사들에게 대비케하여 자발적으로 투항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함에 임금이 공감하고 깊이 감탄하면서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하여 다섯 성(城)을 설치하고 모진 흙메로 공격해 적을 투항하게 하였다.
이후 임금이 공을 매우 중용하였다. 공이 연로하여 마침내 회복할 수 없이 그 명(命)을 다하게 되었다. 공의 선부인(先夫人) 성산 이씨(星山李氏)가 1남 1녀를 두었는데, 뒤에 광평군군(廣平郡君)으로 봉하였으며, 재취한 최씨(崔氏)가 1남을 두었으나 최씨와 아들 모두 일찍 죽었다. 지금의 부인 상당군부인 김씨(上堂郡夫人金氏)가 공을 섬겨 지성을 다하였으나 자녀가 없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공의 장남 순(純)이 평장사(平章事) 조중장(趙仲璋) 공(公)의 딸과 혼인하였고 딸은 정주사합문지후(定州使閤門祗侯) 신영린(愼永隣)에게 시집갔다. 공의 나이 83세, 1144년 봄 2월 을미(乙未)에 별세함에 3월 10일 정주계내(汀州界內) 동쪽 산록에 화장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태부(太傅: 태사, 태보와 함께 삼사의 하나로 정1품직)에 임명하였다. 이 해 가을 8월 18일에 이곳에 뼈를 묻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백수(白首)토록 한결같은 절조 오직 공 그 사람 뿐이로다.
저 동비(東鄙)의 공업이 높고 높아서
지위가 낭묘(廊廟: 재상)에 올랐고 스스로 경륜을 지녔다.
급자기 변을 당하여 수년간 곤궁하게 지냈네
그 시대 한 선비로서 충성으로 간하니
군신(群臣)이 의심하매 봉록을 버리고
풍현(豊縣)에 은거하니 고장이 화평하도다
숙연히 세상을 떠나니 곁에 모시던 분들도 알지 못하였네
찬: 김정(金精) / 문림랑 시상서예부시랑 지제고(文林郞 試尙書禮部侍郞 知制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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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시대 사료 DB / 양천허씨대종회 60년사,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