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이름이 허서(舒)이고 자는 공숙(恭叔)이며 통훈대부 포천현감 허교(喬)의 셋째아들이다. 배위는 제16대 임금 인조대왕의 아우인 능창대군(綾昌大君) 이전(佺)의 따님인 전주이씨(全州李氏)다. 미수공 허목(穆)의 둘째 동생이다. 미수공은 동생 허서(舒)의 묘기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공은 이름이 서(舒)이고 자는 공숙(恭叔)이다. 우리 형제 5인이 선인의 가르침에 힘입어 모두 벼슬을 하였으나 무능한 내가 벼슬이 높으니 심히 부끄럽다. 군은 나보다 17세나 아래인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즐겼으며 나 믿기를 고인(옛 어른)과 같이 생각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묻지 않고는 하지 않았으며 한 가지 물건이라도 묻지 않고는 가지지 아니하고 한 그릇의 음식이라도 함께 먹지 않으면 배부르지 않다고 하였다. 나는 고인과 같지 않으나 군의 의지와 품행은 가히 취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며 자애로와서 착한 말을 듣거나 착한 행실을 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니 이것은 그의 천성이라. 내 심히 어여삐 여겼더니 장성하여서는 더욱 정밀하고 민첩하며 재주가 많아 초서와 예서를 잘 써서 사람들이 다투어 얻고자 하였다. 중년에 세상에 속된 일을 당하여 내가 산으로 바다로 떠돌아다니고 군은 벼슬을 따라 서울에 있다가 난리 후에 집안 친척이 흩어지니 매일 친구들과 술만 마셨다. 그러다 병을 얻은지 십년이라 함께 마시던 친구들은 모두 죽었으나 호안(湖安)과 능봉(綾峰) 두 친구는 단주함으로서 명을 유지했다. 주독이 오래되면 장부가 상함으로 무병하여도 죽는다고 매양 서로 경계하였더니 군도 또한 이것이 허튼 얘기가 아니었다.
아! 함께 있을 때가 많지 않고 술 마시는 날이 많아 이것이 병이되어 고치기 어려웠으니 슬프다. 쇠로한 나는 살고 건강하고 굳센자는 죽으니 내 이것을 명이라 믿지 않노라. 연천에 사는 일가 국자(國子) 진사 선(垾)이 사주를 잘 보아 항상 나에게 말하기를 앞으로 10년 후에는 집안 운수가 비색하여 흉한 일이 잇달아서 일어난다고 하더니 내가 좌천되어 삼척에 간 지 몇 달 후 군이 사망한 부고가 전하여 오니 생각컨데 지금이 이미 10년이 되었구나. 내가 늙어 죽을 때에 이르러 형상이 더욱 외로워 보이고 귀신 앞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일을 당하게 되니 죽은 자는 아득하고, 공연히 세상에 남은 자로 하여금 마음 상하고 오래도록 울게 하느냐
1637년(인조 15) 강릉 참봉을 시작으로 제용감 봉사, 직장, 내자시, 사복시, 장악원 주부, 조지서 별제, 의금부 도사, 사헌부 감찰, 돈령부 판관, 영월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군은 1612년(광해군 4) 3월12일에 나서 1661년(현종 2) 1월 11일에 죽으니 나이 50이다. 고조는 좌찬성 자(磁)이고 조부는 전함별제 강(橿)이며 아버지는 포천현감 교(喬)이고 어머니는 나주 임씨니 예조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배위는 원종의 별자 능창대군 전(佺)의 딸이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공(공)과 충(翀)과 호(䎁)와 숙(䎘)이니 충은 중부(仲父) 의(懿)에게 양자가고 호는 나를 따라 중용과 시전과 주역 등을 배울 때, 내 마음으로 사랑하나 매양 책을 대하면 죽은 자의 생각이 되살아나 슬픔을 더하게 했다.
두 사위는 심근과 조태윤이다. 공은 스스로 일가친척과 척당간의 세도를 피하여 글과 술을 가까이하고 항상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왕이 특별히 벼슬을 제수함으로 부득이 종사하였다. 10세 편년에 기록되여 있다.
묘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면 장덕리에 있었는데 그곳의 개발로 인해 1992년 봄, 부여 문중의 주선과 은거당 종손의 배려로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은거당 묘역내로 이장하였다.
글쓴이:
번역:
출처: 양천허씨 합천공파종사,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