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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허씨  22세  / 조선시대

허의(懿)

[현직(실직)]  송화현감(松禾縣監)  / 봉정대부(奉正大夫)

1. 프로필

옛 족보는 남성을 먼저 기록하고 여성을 그 뒤에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출생순서는 실제와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시대 : 조선 세수 : 22세 향년 : 67
성명(한글) : 허의 성명(한자) : 許懿
성별 : 남 생몰년(음력) : 1601/04/26 - 1668/12/01 출생순서 : 2/8 (순서/총자녀수)
호(號) : - 자(字) : 중징(仲徵) 아버지 :
최초 등재족보명 :

2. 파명

대파명 중파명 소파명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합천공파(陜川公派) 송화공파(松禾公派)

3. 과거시험

과거급제 문과 자료는 정부기록물을, 무과와 잡과 그리고 소과 자료는 구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과거 : 과거(문과, 무과, 소과, 잡과)와 관련된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4. 관직 및 품계 / 봉작

역대 역임하신 관직과 품계, 봉작 이력입니다.

구분 관직/직위 품계/봉작 시기 비고
현직(실직) 송화현감(松禾縣監) 봉정대부(奉正大夫)

5. 장사(葬事) 및 묘소정보

묘소 정보는 구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합장여부 : 각장
본인 : 허의(懿) 장례종류 : 매장 좌향(坐向) : 미상(未詳)
소재지(국가) : 주소 : 실전(失傳) 또는 소재지 정보가 없습니다.
나의 이야기

제목 : 22세 송화공 허의(懿) / 한글 번역문

자는 중휘(仲徽)이며 호는 죽천(竹泉) 이다. 통훈대부 포천현감 허교(喬)의 둘째 아들이며 미수공의 첫째 동생이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종형 관설공(觀雪公) 허후(厚)에게 수학하다가 자라서는 형인 문정공(文正公) 미수(眉叟) 허목(穆)에게 배웠다. 공은 꿋꿋한 절개가 있고 의리를 중히 여겨 일찍 세상사에 간여할 뜻이 없었다. 음악에 정통하고 또한 서화에도 능하여 아버님께서 돌아가심에 도상을 그려 모시고 생존 시와 같이 추모하였으니 지금도 그 영정이 은거당 종손가에 전해 내려온다.

제16대 임금 인조 14(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재차 침입하는 병자호란이 있어 어머니를 모시고 경상남도 사천 및 창원과 의령으로 피난하였다. 일찍부터 어머님께 병이 있었는데 공이 정성을 다해 입에 맞는 음식을 공양하였다. 한번은 꿩이 부엌으로 날라드는지라 사람들은 모두 공의 효행이 하늘을 감동시킨 까닭이라고 했다. 인조 25(1647)년에 어머님이 의령에서 별세하시자 연천으로 모시고 가 장사지낸 후 3년을 시묘(侍墓)했다. 미수공이 《경례유찬(經禮類纂)》 13편을 지을 때 공에게 명하여 그 제목을 모두 정하게 하니 공은 배우고 얻은 바가 많았다.

제17대 임금 효종 5(1653)년에 중림도찰방이 되었다가 효종 9(1657)년에 내자시직장으로 옮기고 무술년에 태악주부가 되어 아악(雅樂)을 상고하고 악기를 보수하였다. 중림도는 경기도 인천을 중심으로 역마(驛馬: 역참에 준비해 둔 말)를 바꿔탈 수 있는 역(驛)이며 찰방은 이곳을 관할하는 외관직으로 종6품이다. 이곳의 관할 지역에 속한 역은 양천(陽川), 시흥(始興), 안산(安山) 등이며 양천-부평(富平), 양천-통진(通津) 등에 이어지는 역로 또한 이곳에서 관장했다. 이어 송화현감(松禾縣監)이 되었는데 그때 백성들이 세미(稅米: 세금으로 바치던 쌀) 받칠 것을 크게 걱정하자 공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비록 납부치 못 하였더라도 각자 생업을 도모하라” 하며 “벌을 받을 지언정 어찌 민중을 구제치 않으리요” 했다. 마침내 세미를 거두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어 호남으로 귀양가게 되니 군민 남녀가 거리를 메워 울면서 모두 세미를 내어 어진이의 죄를 면하게 하려 하였으나 공이 스스로 관으로 가 귀양 가기를 원하니 행장이 쓸쓸하기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귀양에서 풀려, 의령 자굴산 밑으로 돌아와 지냈다. 계시는 곳에 맑은 샘과 대밭이 있어 자호를 죽천이라하고 그 촌명을 모의(慕義)라 고쳤다. (미수공은 때때로 이 모의촌에 와서 공과 함께 지냈는데, 당시 미수공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와 두 분이 노시던 곳이 아직 남아 있다. 1600년 중엽 미수공이 심었다고 전해오는 이 은행나무는 미연서원으로부터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행정리)

자손을 위하여 한 가지 산업도 경영해 놓은것이 없으며 남는 물자가 있으면 반드시 남에게 주고 먼 곳의 친구와 손을 청하여 글과 거문고로 즐거워하고 혹은 금조(琴調)로 창화(唱和)하고 닭과 개를 기르되 모두 길들여 먹을 것을 던져주어도 서로 싸우지 않으니 사람들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그때 재상들이 왕에게 고하여 다시 태악에 기용코저 하였으나, 공의 뜻이 없음을 알고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공이 고을 풍속이 좋치 못함을 보고 여씨향약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여 향리 자제들을 모아 춘추로 강론하며 불효한 자와 불우한 자, 불목(서로 사이가 않 좋음)한 자와 시댁과 불화한 자를 규탄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화하였다. 지금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의령 고을에서는 아직도 그 규약을 지키고 있으며 의령군지에 그 내용이 전한다.

형님 미수공은 동생 허의(懿)의 죽음에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장명을 지었다.

망제의 이름은 의(懿)이고, 자는 중휘(仲徽)이며 호는 죽천(竹泉)이다. 우리 양천허씨는 공암촌주이래 우리 형제에 이르기까지 22세이다. 증조는 자(磁)니 벼슬은 좌찬성이고, 조부는 강(橿)이니 방정한 품행으로 전함사별제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교(喬)이니 치적으로 칠읍(七邑)을 역임하였으며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있다가 별세하고 어머니는 나주임씨니 춘관정랑 임제의 딸이다. 우리 아들 5인 중 군이 차자로서 총명 다예하며 율려(律呂: 음악이나 음성의 가락)에 통달하여 여러 악기 소리만 들어도 그 운조를 능히 전하니 이는 천재요 사람의 미칠바 아니다. 또한 인물화에 능하여 부친 돌아가신 후에 도상을 그리니 방불한(거의 비슷한) 모양이 영혼이 있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고려 문정공(文正公) 이색(李穡)의 화상을 그려주니 자손이 영당을 지어 모셨고 내가 보는 바 그가 그린 여러 그림 중에 「달마도」와 「백록선인도」가 가장 기이하였다. 효종조에 출사하여 중림도찰방을 지내고 여러 곳으로 옮긴 뒤 태악주부가 되어 아악을 상고하여 악기를 보수하니 모두 적임이라 하였으며 1년 후 송화현감으로 전직되었다가 파하고 낙향하니 재상들이 왕에게 고하여 태악으로 다시 부르고저 하였으나 실행치 못했다. 군은 병이 쌓여 3년 만에 의령에서 별세하니 68세였다.

내 금년에 74세로 홀연 불락(不樂: 즐겁거나 기쁘지 않음)하야 사변의 감이있어 홀로 슬퍼하고 탄식한다. 사람이 늙으면 장차 죽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나 군의 부고가 급하게도 먼저 오니 동기간의 죽음에 감정이 복바친다. 아! 슬프도다. 배위는 사천이씨(泗川李氏)로 부제학 귀암(龜巖) 이정(李楨)의 4세손이요 국자진사 이대일의 딸이다. 지성으로 선행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어, 죽을 때 그 친정아버지 묘 아래 장사지내 주기를 양자에게 부탁하니 아! 가엾어라. 내 좌천되어 삼척에 있을 때에 계제가 죽고 이제 또 군이 객사하니 그 죽음을 보지 못하누나. 나 홀로 죽지 않고 늙으니, 마음 상하고 고독하며 또 비통하고 슬프다. 사천의 감곡에 그 처와 동원에 장사지냈다.

명(銘)하여
삶의 근본이 무엇이며,
주검이 무엇이고,
즐겁게 사랑하는 마음의 생김이 무엇이며,
슬퍼서 울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주검으로 돌아간 자 아득하고,
뒤에 죽는 자는 멀고 넓으나
생은 끝이 있는데
울음은 끝이 없도다.

처음 사천 감곡에 장례하였으나 현재는 의령군 대의면 중촌리로 이장하였다.

글쓴이:   
번역:   
출처:   양천허씨 합천공파종사,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