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Portrait 21세 …
양천허씨  21세  / 조선시대

허교(喬)

행직:  포천현감(抱川縣監) / 통훈대부(通訓大夫)

1. 프로파일

옛 족보는 남성을 먼저 기록하고 여성을 그 뒤에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출생순서는 실제와 다를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시대 : 조선 세수 : 21세 향년 : 65
성명(한글) : 허교 성명(한자) : 許喬
성별 : 생몰년(음력) : 1567/08/21 - 1632/12/02 출생순서 : 3/4 (순서/총자녀수)
호(號) : - 자(字) : 수옹(壽翁) 아버지 :
배우자 : 생몰년(음력) : 1575/02/03 - 1647/07/10 배우자 품계 : 숙인 / 정3품, 증(贈): 정경부인 / 정1품(외명부)
배우자 : 생몰년(음력) : 1591/10/11 - 1649/10/25 배우자 품계 : -
최초 등재족보명 :

2. 파명

대파명 중파명 소파명
판도좌랑공파(版圖佐郞公派) 합천공파(陜川公派) -

3. 과거시험

과거급제 문과 자료는 정부기록물을, 무과와 잡과 그리고 소과 자료는 구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과거 : 과거(문과, 무과, 소과, 잡과)와 관련된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4. 관직 및 품계

관직과 품계는 행직의 경우 생전의 마지막 관직과 품계를 보여줍니다.

행직 행직
문/무관 : 문관 (조선)
관직(행직/수직) :  품계명(행직/수직) :  품계(행직/수직) :
관직(명예직) :  품계명(명예직) :  품계(명예직) :
행직(현대) : 군수 명예직(현대) : 국무총리

5. 장사(葬事) 및 묘소정보

묘소 정보는 구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합장여부 : 동일 장소에 모심 장례종류 : 매장 미상(未詳)
소재지(국가) : 대한민국 주소 : 경기도 (대한민국) 미상, 미상 왕징면 강서리 산 90
나의 이야기

제목 : 21세 허교(喬) 묘비문 / 한글 번역문

이름은 교(喬)이고 자는 수옹(壽翁) 또는 유악(維岳)이라고도 하며 성은 허씨다. 고영고령 원(瑗)의 증손이며 좌찬성 자(磁)의 손자요 증 좌찬성 강(橿)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진주강씨는 우의정 숙헌공 강귀손(姜龜孫)의 증손녀다. 명종 22(1567)년 8월 21일에 탄생하였다.

어려서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 선생에게 수업하였는데 수암 선생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선생의 제자이다. 당시 수암 선생의 연세가 80여 세였으나 총명이 쇠퇴하지 않았다. 공이 수련하는 방법을 배우기 청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세상 풍속을 등지고 자기 지조만을 지켜나가는 선비 중에는 간혹 그것을 수련하는 사람이 있으나 배우는 자가 먼저 힘쓸 일은 아니다” 하고, 말해주지 않았다.

선조 25(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군자(先君子: 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 선친)가 협북에 피란 하던 중에 73세로 작고하니 연천에 돌아와 초빈(草殯)하였다. 그 당시에 전쟁이 양호(兩湖: 호남과 호서를 통털어 이르는 말)의 서쪽 경계에는 미치지 않았으므로 70여세 된 어머님과 친척 가솔들 그리고 고아와 과부 등 1백여 명을 거느리고서 호우의 나그네로 다니다가 정성을 다하여 장례에 쓸 물건을 다 갖추어 갖고 와서 장사 지내니 보는 사람들이 탄식하기를, “훌륭하다 효자가 어버이 장사지내는 정성이여” 라고 하였다.

선조31(1598)년 공의 나이 32세 때에 재상이던 김명원이 그의 행실과 재능을 천거하여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 군수품 비축을 관장하던 군자감의 종9품 벼슬)에 제수되었다. 때마침 왜적이 물러가자 남과 북의 관병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하였는데 공이 군량 분배하는 일을 분장하였다. 여러 번 전직하여 사섬시(지폐의 발행과 노비가 공납하는 면포를 관장하던 관청)와 제용감(왕실에서 필요한 의복이나 식품 등을 관장하는 관서)의 봉사와 직장이 되었으나 호조판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파직된 지 2년 만에 어머님이 81세로 별세하자 3년상을 마치고 의금부 도사(의금부의 정6품 관직)에 재배 되었다가 선공감 직장으로 전직되었다. 다음 해에 선조가 승하하매 무릇 관곽과 상여에 따르는 모든 일을 맡아보고 초빈이 끝나자 신병으로 한가한 직책인 내자시 직장(왕실에서 소용되는 각종 물자를 관장하던 내자시의 종7품 관직)에 재배되어 졸곡(삼우제를 지낸 뒤에 곡을 끝낸다는 뜻으로 지내는 제사.) 때까지 천신하는 제수 물자를 공급하였다.

다음 해에 사헌부감찰의 직함으로 양성현감이 되었는데 고을을 잘 다스렸다. 1년 만에 고령현감으로 옮겨지자 양성 백성들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유임시켜 주기를 애걸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고령에 허위로 소송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물러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법을 밝히어 거짓을 금하는데는 과연 아무개가 있다” 하고 한번 보고 사례하기를 원하였다. 이웃 고을에 살인자가 있었는데 유력자의 도움을 받고있어 오랫동안 의옥(疑獄: 죄상이 뚜렷하지 아니하여 죄의 유무를 판명하기 여러운 범죄 사건)이 되었다. 공이 조사관이 되어 양편을 심문하매 살인자가 죄상을 자백하니 그의 원수였던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려 사례했다.

곽재우(郭再祐)가 그 소문을 듣고 감탄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음덕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광해 10(1617)년, 공의 나이 52세에 거창현감이 되었다. 그때 큰 옥사가 있었는데 초당(草堂) 허엽(曄)은 이미 죽고 그 자손이 아무 말도 못하고 연좌되어 사형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공이 전대(前代)의 구의(舊誼: 예전에 가까이 지내던 정분)를 생각하여 서울로 황급히 올라와 화난(禍難: 재앙과 환난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입은 사람들을 위문하고 따로 주선하여 모두 죽음만은 면하게 하여 해도(海島: 바다에 있는 섬)로 유배되도록 하니 그들이 손을 잡고 흐느끼면서 사례하고 그 처자들을 공에게 부탁하였다.

거창에 부임한 지 3년 만에 산음현감으로 옮겨졌다. 그 고을의 전임 군수는 집권자의 버릇없는 자제였기 때문에 고을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던 터 였으므로 공이 부임하니 고을 사람들이 서로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제야 다시 옛날 군수의 정치를 보겠구나” 하였다. 인조 1(1623)년에 공이 산음현을 떠나 집에 와 있었는데 그때 나라에는 반정의 일이 있어 문충공 이원익(李元翼)이 다시 정승이 되니 공이 사사로이 찾아보고 말하기를 “공업(功業: 큰 공로가 있는 일)이 세상을 덮었다 하더라도 청사(淸士: 청렴하고 결백한 선비)라면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오” 하니 이원익이 얼굴빛을 고치며 감탄하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동애공 허자(磁)의 자손에 이러한 사람이 있었구나” 하였다 한다.

인조 4년에 계운궁의 상사가 있자 존숭의 예를 거행하지 않았는데도 왕후에게 쓰는 관곽과 상여를 사용하여 초빈하고 그 제도에 의심이 나자 선왕의 초빈 때에 공작(왕의 관곽을 만드는 일)을 맡았던 사람이 아무개라고 생각하여 공을 불러들여 물었으나 사양할 뿐 대답하지 않고 갔다. 12년 겨울 인조의 계비 조씨의 장사 때에 공이 포천현감이었는데 교량(橋梁)과 소사(小祀)에 쓸 제물을 제공하였다.

오래 전부터 있던 병이 위독해져서 그해 12월 2일 관사에서 별세하니 향년 66세였다. 병중에 나에게 경계하기를 “포의(布衣: 벼슬 없는 선비)였던 나로서 염습과 장례가 선인(先人)보다 못 해야 만족하니 조심껏 내 뜻을 받아 이미 죽은 사람의 마음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다음 해 2월 연천 선산 북쪽 언덕에 남향으로 봉분하여 장사지냈는데 장례에 이문충공 이원익(李元翼)이 아래와 같이 조곡하였다.

종족을 어루만지며 보살피기를 撫恤宗族
지성으로 하여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至誠不怠
아 진정한 그 인자함이여 吁其仁也
일곱 고을을 두루 다스렸지만 歷典七邑
장례가 소박하니 棺殮無物
아 진정한 청빈이로다 吁其貧也
위로는 어진 조고와 선친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上不負賢祖考
아래로 또 어진 아들과 조카가 있어서 下又有賢子姪
아무 걱정 없이 무덤으로 돌아갔으니 浩然返丘壟
이만하면 만족하도다 如是而足矣

공이 두루 7읍을 다스렸으나 하나의 재산도 모아 놓은 것 없이 항상 거문고를 탔는데 휘귀한 음악과 옛스런 곡조를 즐겼다. 어떤 때는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탄식하기를 “평생동안 고인과 같기를 기약하였는데 늙도록 알아 주는 사람 하나도 없이 하찮은 녹을 구해 뭇 사람들처럼 쫓았으니 일생이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그리고 자제들을 가르칠 때면 반드시 말하기를 “이로움을 보거든 수치스러울 것을 생각하고 의로운 말을 듣거든 반드시 힘쓸 것이며 스스로 욕되게 남에게 아첨하지 말라” 하였다.

어느 때고 박지화 선생의 옛 저택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서 내리면서 말하기를 “젊었을 때에 추종하며 공경하던 곳인데 늙었다 하여 감히 잊을 수 없다” 고 하였다. 노비들 중에 죽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옷을 벗어서라도 관을 갖추어 조심스럽게 묻어주면서 말하기를 “노력한 수고에 보답으로는 부족하다” 하였다.

금천현감으로 있을 때에 종형의 자녀가 죽어서 강가에 출빈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오랜 병 때문에 초빈에 참여치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웃에 손님이 있어 맞이하여 서로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는데 책망하기를 “온 집안에 곡읍하는 소리가 초상 때와 같은데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나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명을 듣고는 두려워서 이제 늙어 죽을 나이에 이르도록 그 훈계가 귀에 역력하여 감히 잊지를 못한다. 돌아간 자의 부인은 나주임씨(羅州林氏)다.

외조는 예조정랑 임제(林悌)이며 내게 형제가 다섯 명인데 나 목(穆)이 첫째다. 공(公)이 별세한 지 벌써 40년이 되었는데 목(穆)이 우의정이 되므로써 공을 영의정에 추작하고 부인을 정경부인으로 추봉하였다. 둘째 의(懿)는 송화현감이고, 셋째 서(舒)는 영월군수요 또 후실에서의 아들은 달(達)과 순(順)이다. 순(順)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입사하지 못하고 죽었다. 딸이 가장 맏인데 선공감 감역 권복길의 처가 되었다. 목(穆)은 훤(翧)과 함(𦑘)과 도(翿)를 낳았는데 함(𦑘)은 안협현감이요 두 사위는 윤승리와 정기윤으로 기윤은 내자시 직장이다. 의(懿)는 별자(別子: 서자) 삼인이 있었으나 아버지가 죽자 두 아들은 곧 죽었다. 둘째 아들 흡(翕)은 처가가 있는 영광으로 가서 살고 서(舒)는 공(𦏼)과 충(翀)과 호(䎁)와 허숙( )을 낳으니 공(𦏼)은 무과로 영남우절도 우후(虞侯: 절도사 밑에 두었던 종3품 무관의 외관직)요 호(䎁)는 공릉참봉이며 두 사위는 심근과 조태윤이다. 권복길의 아들 권확(穫) 또한 무과로 출신한 자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75세 때인 광해군 9(1617)년에 보낸 편지 ‘허거창(許居昌) 교(喬)에게 보냄’의 내용이다. 공이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냈으므로 허거창이라 불렀으며 공은 한강보다 24년 연하이다.


허거창(許居昌) 교(喬)에게 보냄 - 정구(鄭逑)

지난 번에 그대가 나를 찾아와 오랫 동안 만나지 못해 궁금하던 심사를 해소한 일은 너무도 흐뭇하고 감격스러워 시일이 이미 오래 지난 지금까지도 감히 잊지 못하고 있네.

그런데 지금 찾아온 서계서원(西溪書院)의 유사를 통해 그대의 근황을 듣고 더욱 기쁘고 위안이 되었네. 나는 멀리 봉산(蓬山) 동래(東萊)의 온천수에 목욕하고 돌아왔지만 조금도 효험을 얻지 못하고 몇 달 동안 신음하고 있는데, 이는 먼 여행길에 시달린 것이 원인이네.

낫기 어려운 병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한번 낫게 해 보려고 시도하는 자신이 가증스럽네. 서계서원은 이제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사우(祠宇: 사당)의 단청도 이미 아름답게 빛나고 있으니, 이는 실로 문치(文治)를 숭상하는 우리 그대의 정성이 이루어 낸 결과이네 그 고맙고도 다행스러운 심정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지금 위패를 봉안할 날짜를 이미 중춘(仲春) 중정(中丁)으로 정했다는 말을 들었네

아직 죽지 못한 이 늙은 문하생으로서는 병든 몸을 부축하고서라도 서원에 가서 지난 날 선생께서 끼치신 법도를 접해 보아야 할 일이겠으나, 한쪽이 말라 버려 절름거리는 몸으로는 몸을 추슬러 일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에 병든 몸을 어루만지며 비탄에 잠길 따름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오직 그대께서 온 정성을 다해 매사를 보살펴 주기 만을 믿을 뿐이네

그렇게 해 준다면 비록 어떤 불완전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듣건대, 많은 사류(士類: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선비의 무리)의 모임에 아침 저녁으로 먹을 음식을 제공하는 일은 소홀히 할 수가 없는데 땔감을 주워 오고 밥을 지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네. 이전에 관아에서 지급 받은 노복(종살이를 하는 남자)으로서 노쇠하여 일 하지 못하는 자들을 잠시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사류들로 하여금 굶주리고 목이 마르는 곤경을 면하게 해 줄 수는 없겠는가? 이처럼 해 준다면 사림이 다 함께 그대를 우러러 흠모할 것인데, 이 모든 것을 어찌 다 형언할 수 있겠는가

서원을 위하는 마음이 절박해서만 아니라, 그대를 위하는 정 또한 간절하기에 감히 부질 없는 말을 하고 보니, 부끄럽고 송구스러워 얼굴이 붉어지네.

글쓴이:   22세 허목(穆)
번역:   
출처:   양천허씨합천공파종사, 2015년